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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목포역(驛)의 멜라콩
강 명 찬 목포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전남신문
대한민국 최서단에 위치한 호남선의 종착지 목포역만큼 남도의 정한을 그대로 간직한 곳도 드물다.
일제강점기였던 1913년 개통한 이래 2004년 KTX 열차가 운행되면서 현대식 역사로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포역은 100년 세월 서민들의 애환을 묵묵하게 지켜왔다. 철길은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갈 수는 없지만 종착역은 또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시작점이 아니던가! 저 추억의 60년대, 이곳 목포역에 <멜라콩다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많지 않은 것 같다. 
멜라콩은 48년 동안 목포역에서 짐을 나르다 67세에 세상을 떠난 박길수(朴吉洙)씨의 별명이다. 작은 체구에 마른 체형으로 사지가 불편하고 입마저 틀어져 말을 하면 쉽게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장애인이었던 그는 열두 살 때 고향인 장흥을 등지고 목포에 나오게 된다.
역 앞에서 노점상하는 부모님을 도우며 대합실에 기거하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나는 대로 역내 청소를 곧잘 하곤 했는데 그때 <멜라콩>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장애인인 그의 모습이 사무라이 영화에 나오는 극중 인물 멜라콩과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부지런하고 항상 웃는 성품 때문에 목포역 화물취급소에 취직하게 된 그는 성치 않은 몸으로서 건강한 수천수만의 사람을 도왔고 누구보다도 뜨겁게 목포사랑을 실천했다. 그가 목포역의 대명사로 지역민들에게 회자되게 된 것은 무엇보다 기념비적 <멜라콩다리>를 세운 일 때문이었다.
지금의 목포땅 80%는 간척과 매립으로 이뤄졌는데 1960년대 까지도 목포역 옆으로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산정동에서 선창으로 가려면 목포역 광장을 가로질러가지 못하고 개천을 빙 돌아서 가야만 했다. 학교가는 아이들이 시간에 쫓겨 철길을 뛰어 건너다 다치기도 했으며 부두에서 생선을 팔고 돌아가는 아주머니들은 개천을 돌다 기차를 놓치기 일쑤였다. 멜라콩은 그 중간에 다리를 놓기로 결심했다.
그는 푼푼히 모은 돈 6천원을 내놓고 시내 가가호호를 돌며 직접 모금운동에 나섰다.  ‘지 다리도 성하지 못헌 놈이 뭔 다리를 놓느냐!’ 는 주위의 냉소에도 굴하지 않고 다리공사에 필요한 철근과 시멘트를 직접 구하러 다녔다. 멜라콩의 고집은 모두를 감동시켰고, 마침내 1964년 봄 <멜라콩다리>가 준공되었다. 가난한 장애인의 힘으로 다리가 놓이자 목포시민들은 깜짝 놀랐고 타 시군에서 목포역을 내왕하는 사람들도 칭찬과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스스로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장애인이면서도 남을 위해 살았던 박길수씨의 봉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멜라콩 화물보관소>를 만들어 무거운 짐꾸러미를 어디다 간수할지 몰라 힘들어하던 사람들을 도왔다. 또 태풍이 불면 섬에 돌아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거나 육지에 나왔다가 여비마저 떨어져 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야하는 섬사람들을 재워주기 위하여 손수 주워 모은 합판으로 역전 광장 모퉁이에  <멜라콩 무료숙박소>도 건립했다. 그 후로 가난한 섬사람들은 뱃길이 끊겨도 잠자리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무일푼의 장애인이었지만 「1년1선행」의 실천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몸소 보여준 자랑스런 목포시민이었다.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어 <멜라콩다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목포 사람들의 가슴속에 ‘멜라콩 다리’는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다리로 기억되고 있다. 
얼핏 <노틀담의 곱추>와 같은 성찮은 몸으로 엎어지며 넘어지면서도 손님들의 짐을 정성껏 날랐으며,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이웃을 위해 쓸 줄 알았던 멜라콩은 목포역과 함께 영원히 목포의 따뜻한 이야기로 살아있을 것이다.   

 
기사입력: 2016/02/24 [09:57]  최종편집: ⓒ 전남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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