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아버지에 이어 옥공예 전통잇는 장동기씨

“옥공예는 제2의 인생 … 장인의 길로 접어들어”

전남신문 | 기사입력 2016/01/21 [10:36]

특집-아버지에 이어 옥공예 전통잇는 장동기씨

“옥공예는 제2의 인생 … 장인의 길로 접어들어”

전남신문 | 입력 : 2016/01/21 [10:36]

한전 생활접고 낙향, 15년간 이수자 생활로 기술터득
스펙보다 기술습득 우선 … 젊은 작가 힘실어 줘야


옥은 예날부터 가장 값진 보석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유럽과 남미에서도 각광을 받으면서 더욱 귀한 보물로서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옥은 위로는 군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범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옥을 진귀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옥으로 말미암아 국가간 불화를 불러일으킨 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옥은 있는 그대로의 형태만으로도 아름답고 진귀한 것이나 장식으로 사용함에 갈고 쪼으고 닦지 않으면(절차탁마)필요한 물건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했으면 당 태종은 “옥은 비록 아름다운 질을 갖고 있으나 돌들과 섞여 양공의 갈고 닦음이 없으면 돌덩어리와 다를바 없다.만약에 훌륭한 공인을 만나면 만대의 보배가 된다”라고 말했겠는가.
중국의 수천만 옥공예가들도 부러워하는 옥장 장주원 선생이 목포에 건재하면서 중국의 온갖 부러움을 한데 받고 있다.
중국에서는 그 부러움에 대한 아쉬움을 우리나라 인간문화재급인 중국대사로 임명하면서 장주원선생의 기술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예향 목포에서는 이러한 옥공예 장주원선생의 기술력과 후진양성을 위해 옥전수관을 세우고 운영하고 있다.
특히 옥장 장주원 선생의 차남이자 옥전수관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장동기씨(52).
장동기씨는 최근에야 이수자과정을 이수했다.
무려 15년만이다.
장씨는 목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근무한 후 지난 1994년 한국전력에 입사했다.
하지만 당시 인기절정 기업인 한국전력에서의 회사생활을 6년여만에 접고 2000년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을 다시 찾았다.

장씨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형(장석 경기대교수)이 대학교수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자 아버지께서 너도 옥공예를 물려받았으면 하는 뜻을 내비쳐 과감히 내려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장석 경기대 교수(57세)는 옥공예를 시작으로 공예과정에 입문해 지금은 금속공예과교수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당시 장씨의 부인은 인천에서 중등교편을 잡고 있었다.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온 뒤로 정식적으로 전수받기 시작했다.
아버지이자 스승인 장주원 선생에게 집중지도 2~3시간을 포함해 하루에 8시간씩 한치의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열심히 배웠다.
아버지 또한 장씨의 재능을 본 뒤 자신보다 더 훌륭한 제자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열심히 지도했다.
장주원선생은  “어릴적부터 봐와서 그런지 다른사람보다 빠르게 배우는 것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씨는 “아버지는 전수자들에게 평소에 잘못했다고 질책하기 보다는 이렇게 했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다독이는 스타일이어서 인지 모두가 잘 따르는 편이었다”고 회상했다.
장씨와 함께 당시 5명이 전수생활을 했다. 당시 공방은 산정동 성당인근 장주원선생의 집이자 공방에서 생활했다.
장동기씨는 전수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아버지의 많은 기술들을 습득한 점이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자부한다.
옥공예의 가장 중요한 기술중 하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옥석을 고르는 것이다.
옥원석이 좋아야만이 좋은 작품이 나올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옥제작 공정은 채석, 디자인 절단, 성형, 구멍뚫기, 홈파기 등의 세부조각과 광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전수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전체기술을 받은것이다.
특히 장주원선생이 작품으로 승화시킨 연결고리나 여의주등의 고난도 기술은 터득하는데 4~5년 정도 걸렸단다.
이처럼 기본적인 기술과 고난도의 기술을 터득하기까지 오랜세월을 보내면서 가장 큰 고민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어떤 분야를 선택 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의중과 앞으로의 진로등을 생각하면서 전통 옥공예를 배우기로 결정했다.
장동기씨의 첫 번째 작품은 벼루였다.
벼루를 선택한 이유는 전통옥공예의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상징성때문이다.
장동기의 작품의 특징은 원칙에 바탕을 두면서 갖가지 기술들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다.
벼루를 만들기 위해서 옥공예의 가장 기본이라 할수 있는 원석고르기에 온갖 신경을 쓰는 부분을 엿볼수 있다.
벼루작품에는 연지와 연당이 있다.
연지는 평평한 땅을 연당은 갈아놓은 먹물을 보관해두는곳이다.
이를 차별화 하기 위해서 검은 원석과 아울러 연당을 표현할수 있는 흑옥에 광을 내는 연마작업에 공을 들였다.
연당위에다는 태극벼루, 산수화벼루 등을 자신이 직접 그려 넣어 갈고 닦아 기품을 더하고 있다.
앞으로는 “벼루뿐만이 아니라 연적, 수반, 붓걸이등 문방사우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어 우리의 옥공예 전통을 잇겠다”는 포부다.
장씨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은 다섯작품으로 흠잡을데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국적인 대회에는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나가서 상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기술은 대회참가자 보다 훌륭하지만 그런 시간을 아껴서 하나라도 더 연마해 자신보다 더 나은 옥공예 장인이 됐으면 하는 아버지의 바람때문이다.그때 출품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지금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실제로 이수자 자격이 5년이상이면 가능하지만 장씨는 지난 2000년 입문해 2015년에 이수자 자격을 부여한 것은 아버지의 이러한 바람이 담겨져 있다.
이 분야에서는 이수자야 말로 그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로 입문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상식으로 통한다. 
지금은 목포옥공예전수관을 관리하면서 옥공예 저변인구 확대를 위해 체험교실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체험교실에 1년에 보통 150여명 학생 주부등이 찾는다.
학생들에게는 옥을 직접 접하면서 미래에 직업을 선택할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고 있다. 주부들에게는 옥에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운영하고 있다.
한편 옥장 장주원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100호로 1996년 지정됐다.
중국에서는 장주원 선생의 기술계승을 위해 초청을 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중국대사로 2015년 임명했다.
옥장 장주원선생이 중국대사로 인정을 받기까지는 그의 대단한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8천년 옥의 종주국이라고 자칭하는 중국에서 조차도 터득하지 못하고 있는 옥작품 제작의 환주기법,이중 연결고리 등의 한차원 높인 기법은 체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20여년이 걸리기도 하는 그의 끈기와 인내의 장인정신은 한국인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에 충분하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옥공예의 세계에 뛰어든 장동기씨.
순탄한 직장생활을 버리고 쟁이가 아닌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서 뒤늦게 뛰어든 만큼 남들보다 두세배의 노력을 기울이며 아버지의 기술을 터득하면서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오늘도 옥기술 연마에 열중하고 있다.
특히 예향 목포를 잇는 젊은 작가들이 보다 맘편하게 작품할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예향 목포를 이끌어 가기 위해 오늘도 옥만을 바 라보면 한치의 굴곡도 없고 흠도 없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옥공예 저변 인구확대에 노력하고 있는 장동기씨의 앞날에 밝은 광채가 비춰지길 기대해 본다.
/고정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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